유명사찰, 건축물

불교 도입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

칼멘9988 2014. 8. 9. 07:35

 이차돈 불교 도입을 위해 순교하다

이차돈 이미지 1

스물여섯 살의 하급관리인 이차돈(異次頓, 502/506~527)은 몰래 불교를 섬겼다.

 고구려는 일찍이 372년에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몇 차례 승려들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했어도 여기는 난공불락이었다.

불교를 신봉하려면 몰래 섬기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527년, 고구려보다 무려 155년 뒤, 신라의 이 하급관리는 제 목숨을 내놓기로 결심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신라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불교만큼 더 좋은 새 옷이 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내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뜻을 이루리라.

그런 그의 마음을 법흥왕은 가상하게 여겼다.

목을 베인 자리에서 흰 젖이 솟구쳤다.

 신라에, 아니 우리나라 불교에, 나아가 이 땅의 정신사에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흰 꽃이 피는 순간이었다.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 하시리다.” ([삼국유사]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국보 24호인 석굴암 석굴, 신라는 비록 불교를 늦게 받아들였지만, 이처럼 놀라운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출처 : Richardfabi at ko.wikipedia.com>

불교에 관한 한 신라는 극심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곡절은 언제 처음 불교가 신라에 들어왔는지부터 시작하였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 유입을 설명하는 유력한 주장만도 세 가지나 된다.

 

첫째, 눌지왕(417~458)과 비처왕(479~500) 시대라는 [삼국사기]의 주장,

 

둘째, 법흥왕(514~540) 때라는 [해동고승전]의 주장,

 

 셋째, 미추왕(262~284) 때라는 [수이전]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주장이 가장 합당한지 따지는 일은 뒤로 미뤄두자.

이렇듯 여러 주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라에게 불교가 얼마나 골치 아픈 상대였는지 말해 주는 반증이다.

왜 이다지 여러 가지 설이 나왔을까?

 그것은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경로가 그만큼 여러 가지였고,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였음을 말한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의 성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리 잡은 신라의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역사야말로 불교를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찬란한 그들의 문화가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치체제의 안정이 불교를 통해 이룩되었다.

쉽게 얻은 것은 귀한 줄을 모른다.

어렵게 손에 쥔 보물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새로운 보물을 만들어낸다.

신라에게 불교가 그런 것이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은 기독교의 [성서]에 나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말을 우리나라 역사에 대입해 보면, 삼국의 불교수용이 마치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불교가 삼국에 들어오기는 고구려가 가장 먼저였으며, 백제가 다음을 잇고, 신라는 가장 나중이다. 그런데 불교로 한 사회의 꽃을 피우기는 신라에서였다.

 신라의 불교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하나의 좋은 사례이다.

신라 불교가 이렇듯 특별한 길을 걷게 된 데에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가 이차돈일 것이다.

 이차돈은 불교를 위해 순교한 사람이었다.

고구려와 백제 불교에 없는 순교의 전통을 신라에 만들어 준 이가 이차돈이었다.

불교 없이 신라가 이룩되기 어려웠다면, 이차돈 없이 불교 또한 이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까지 매우 험난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오는 과정을 정리한 기록은 [삼국사기]이다.

이를 받아 [삼국유사]는 ‘흥법’ 편에서 세 나라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년)에 순도(順道)가,

백제는 침류왕 즉위년(394년)에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신라는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가 각각 처음 전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가 왕실 차원에서 맞아들여 절을 짓고 승려를 배출해 낸 데 반해,

 신라는 승려를 마치 불법입국처럼 대하였다.

묵호자는 믿고 따르는 신도의 집에서 굴을 파고 숨어 지내다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한 채 떠나야 했다.

뒤를 이어 비처왕 때 아도(阿道)가 찾아왔는데,

 불법체류자 처지는 같았으나 그나마 신도 몇을 만들고 죽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신라 불교의 처음을 아도로부터 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일연은 김용행의 ‘아도본비(我道本碑)’를 들어가며 그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였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인데, 위나라 사람 아굴마(我崛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를 가까이 한 다음 돌아갔다. 이 때문에 임신하여 아도를 낳았다.

 다섯 살 때 출가하였고, 열여섯 살에 위나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 다음,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했다.

열아홉 살에 귀국하여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자 어머니가 신라로 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가 미추왕 2년(263)이었다. 신라 불교의 미추왕 전래설은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일연은 아도가 미추왕 때 사람임을 부정했다. 비처왕 때라야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다만, 아도가 공주의 병을 낫게 한 일, 비밀리에 신도를 모아 가르친 일 등은 받아들이면서,

묵호자에게도 똑같은 일화가 전하므로 아도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묵호자건 아도건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승려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다.

묵호자는 검은 승복을 입은 모습에서, 아도는 아두(阿頭)라고도 하는데,

삭발한 머리 모습에서 나온 말이다.

공주의 병을 고치자 묵호자에게 많은 상을 내리려 하였지만,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아도는 후원자인 왕이 죽자 사람들이 해치려고 해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신라에서 불교가 자리 잡기는 이렇게 어려웠다. 심지어 아도는 신도인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손수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결했다고, ‘아도본비’는 적고 있다.

 

경주 불국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불국사를 통해 신라 불교 문화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널리 자랑하고 있다.
<출처 : 강태훈 at ko.wikipedia.com>

아도의 시대가 지나고 3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비처왕에서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의 시대가 왔다. 남몰래 불도를 닦던 사람으로 성이 박(朴)이며 이름을 염촉(厭觸)이라 하는 이가 있었다. 염촉은 한자식 이름인데, 염(厭)을 신라 말로 이차(異次)라 하고, 촉(觸)은 돈(頓)이라 하여, 우리가 흔히 이차돈으로 부르는 그이이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나, 할아버지 아진찬 종(宗)은 곧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었다. 아진찬이라면 신라 17관직 가운데 4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이다. 그렇다면 이차돈의 집안이 왕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나온 ‘아도본비’에는, 이차돈의 그 때 나이가 스물여섯이고,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할아버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념(一念)이 지은 ‘결사문’에는 스물두 살로 나온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바가 ‘남몰래 불도를 닦던’ 이차돈이라는 대목이다. 스물여섯 살의 아직 젊은 관료인 이차돈이 사실은 불교신자였다는 것인데, 이렇듯 남몰래 불교 신자가 된 사람이 이 시기에 이미 꽤 있었다. 제아무리 탄압을 한다 해도 아도 이후 점점 신자수가 불어났던 것이다. 신라 사회가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것은 기존의 민간신앙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유명사찰, 건축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찰 예절  (0) 2014.09.04
- 우리나라 불교 :   (0) 2014.08.31
♠ 애절한 수덕사의 전설  (0) 2014.08.06
俗離山 法住寺   (0) 2014.06.08
順 天 松廣寺  (0) 2014.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