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멘 글, 시, 방

사육신과 생육신

칼멘9988 2018. 3. 20. 18:12

사육신과 생육신


더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세조가 등극하던 날, 집현전 학사 성삼문은 그날 마침 예방승지로서 당직 중에 있다가

그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는 진작부터 수양대군의 위세가 날로 기세등등해짐을 보고, 조만간에 탈이 날 줄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력한 그로서는 다만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마침내 수양대군이 보위를 빼앗고야 만 것이다.

그때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의 직책상 어보를 수양대군에게 받들어 올리게 되었다.

그는 하도 기가 막혀 어보를 움켜쥔 채 통곡하니 세조가 빼앗듯 가져간 것이다.

세조는 불쾌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자리가 자리였던 만큼 모른 채 덮어두었다.

박팽년(朴彭年)도 그날 마침 당직이어서 그 광경을 보고는 스스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퇴근할 때 경회루 앞 연못에 가서 빠져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는 그를 성삼문이 붙잡고 만류하였다.

영감! 공연히 죽기만 하면 어떡하오.

아직은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가, 틈을 보아 일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박팽년은 눈물을 거두고 사례하였다.

그들은 그 길로 동지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하위지(河緯池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 등을 차례로 찾아가 모의하였다.

우리가 지금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안 될 것이니, 각각 벼슬을 내놓지 말고 가까이 돌면서 기회를 엿보아 거사하기로 합시다.”

그 후부터 그들은 아무런 내색없이 벼슬자리에서 일을 하며, 틈틈이 모여서 계책을 의논하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동지, 김질이 한 사람 더 생겼다.

어느 날 김질은 성삼문의 집으로 찾아왔다.

인사가 끝난 후, 김질은 조용히 성삼문에게 말하였다.

지금 온 조정이 모두 권세에 아부하고 이익을 탐하여 선왕의 대은 후덕을 저버리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소이까.

내 비분한 심사대로 하면 벌써 죽었을 것이나, 구차히 목숨을 붙여 사는 까닭은 후일을 도모하려 함에서외다.

그러나 동심 협력하는 사람이 마땅치 않소 그려! 내 생각다 못해서 노형을 찾아왔지요.

형은 선조의 충신이며 당세의 명현이라,

심중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만한 터이므로 온 것이니, 아무쪼록 힘을 합하여 대사를 이루어 봅시다.”

이렇게 말하는 김질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이 충성이 지극한 말을 듣고, 또 비분의 눈물을 보게 된 성삼문은 감격하여 그의 손을 잡고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 곳서 성삼문은 그에게 그 동안 몇몇 동지들이 모의해왔다는 사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 뒤로도 그들은 자주 한자리에 모여 일을 의논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유응부는 무장다운 태도로 일을 지체하면 위험하니 곧 결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으나, 성삼문의 신중론에 그의 주장은 좌절되곤 하였다.

사육신의 한 명인 성삼문의 집터로, 일대에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이 있다.

그러한 그들에게 마침내 거사의 기회는 도래하였다. 그 무렵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돌아가게 되었다.

세조는 상왕과 함께 그를 전송하는 의식에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성삼문 이하 동지들은 그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은 김질을 시켜 한명회로 하여금 세조에게 말하게 하여, 성삼문 부친 성승과 총관 유응부에게 별운검을 시키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별운검이란 임금이 전좌한 앞에 큰 칼을 들고 서는 2품 관원으로 이 기회에 성승과 유응부에게 보검을 잡게 하여, 틈을 타서 세조를 베고, 정인지·권람·한명회 등 그 심복들을 일제히 무찌르고 나서 상왕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자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처음 그리 하라고 윤허했던 세조가 막상 그날 그 자리에 임하여 뜻밖의 분부를 내리었다.

오늘은 날씨가 덥고 장소도 협소하니 별운검은 들이지 말라.”

이것은 성삼문 등의 거동을 수상하게 본 한명회가 가만히 세조에게 아뢰어,

그런 분부를 내렸던 것이다.

성삼문 등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 돌아보며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유응부는 주먹을 휘두르며 분해하였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지체할 것 없이 이 길로 곧 들이치도록 합시다.


내 이 주먹 하나만으로도 일을 처리할 수 있소.”그러나 다시 성삼문의 신중론에 부딪쳐 제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그 자리에 김질이 보이지 않았다. 일동은 적이 의심이 들었으나 설마!’ 하고 자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도 안이한 생각이었다.

김질은 그날 일이 여의치 못함을 보고, 결심을 바꾸어 동지들을 팔러 갔다.

한명회를 찾아간 그는 동안의 경과를 밀고했으며, 한명회는 또 세조에게 주달하였다.

김질은 동지들을 팔 때 울면서 살려주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중국 사신을 전별한 그 이튿날 세조는 먼저 성삼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추상같은 호령으로 다그쳐 물었다.

네가 너의 도당 여섯 사람과 공모하여 어제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게 사실이냐?”

순간 이것이 김질의 고발이라는 것을 깨달은 성삼문은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대답하는 성삼문의 태도에 세조는 대노하여 곧 금부도사를 시켜 성삼문을 하옥케 하는 한편,나머지 다섯 사람인 박팽년·유응부·유성원·하위지·이개를 모두 잡아들이라 명령했다.

그리고 의금부와 협조하여 포도청에 명하여 제반 형구를 갖추게 한 다음 한명회를 위관(국문을 주관하는 관리)삼아 친히 국문을 시작하였다. 먼저 성삼문을 끌어내게 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고 역적모의를 했느냐?”세조가 묻자 성삼문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하였다. 진짜 왕을 왕위에 복위시키는 것이 어찌 반역이란 말이오.

상왕께서 아직 젊은데 나으리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니 상왕을 다시 복위시키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소?”성삼문의 태연함에 세조는 격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네가 지금 나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르고 있으니,

나의 녹을 먹고 있으면서 배반하는 것이 반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내가 섬길 왕은 오직 상왕이시오. 내 상왕을 멀리 떠나서는 일을 도모할 수 없겠기로 벼슬을 붙들고 있었거니와, 그러나 나으리가 준 녹은 한 톨도 먹지 않았으니, 미덥지 않다면 내 집을 뒤져 보시오. 나으리의 말씀은 사리에 맞지 않소이다.”

그리고 나서 성삼문은 소리 높여 말하였다.나으리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옛적 주공(周公)이 되겠노라고 하였고 또 책문까지 짓게 하였거늘 그래,어떤 주공이 나으리 같은 행위를 했단 말이오.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이 나라에도 두 왕이 있어서는 아니되겠기에 이 일을 도모한 것이오. 그러니 어서 나를 죽여 주오.”

세조는 대노하여 무사에게 명령하여 불에 시뻘겋게 달군 철봉으로 성삼문의 팔과 다리를 찌르면서 가혹한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성삼문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말하였다.

나으리의 형벌이 너무 참혹하외다. 아무리 해도 굴복할 내가 아니니 곧 죽여줌이 어떻소.”

그리고 세조를 쏘아보는데, 문득 신숙주가 세조의 곁에 앉아 있음을 본 그는 한껏 소리 높여 신숙주를 질타했다. 네 이놈 숙주야! 내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께서 당부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한데 너는 정녕 벌써 잊었단 말이냐?

세종께서는 단종을 안으시고 정원을 거니시면서 내가 죽은 후 그대들이 이 아이의 뒷바라지를 해주오라고 하셨다. 네가 이렇게 의리를 잊은 비열한 인간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네 장차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지하의 선왕들을 뵈올 것이냐?”

신숙주는 그저 곤혹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세조가 물러가 있으라고 하자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강희안도 그날 어느 누군가의 진술에 걸려 잡혀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불복하였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그와의 함께 모의한 여부를 물으니 성삼문은, 여보시오, 명사를 한꺼번에 모두 죽이면 나으리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릴 테요? 강희안은 우리와 함께 모의한 일이 없으니 놓아 주시오.” 하여 그는 방면되었다.

성삼문은 살가죽이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단근질을 당하다가 큰 칼을 씌고 하옥되었고, 뒤이어 여러 동지들과 같이 수레에 실려 새남터 형장으로 나갔다.

그는 태연한 기색으로 좌우 사람들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새 인군을 도와 천하를 태평하게 하라.

나는 옛 인군을 뵈오러, 지하로 간다.”그리고 형장에 이르러 참형되기 전에 읊은 시 한 수가 있는데,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한다.북소리 목숨 앗길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도 저무네.황천엔 객점 하나 없다 하거니 오늘 밤 뉘 집에 가 잠을 자리오.

그의 부친 성승을 비롯하여 다섯 아들과 동생, 사촌들까지 모두 연좌되어 죽고, 부인은 관비가 되었다.

죽은 뒤에 그의 집을 뒤져보니 쌀 한 톨 없고,방은 오래도록 불기운이 없었던 듯 냉랭한데 대자리 한 잎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곳간에는 세조에게 받은 녹미가 고스란히 쌓여 있더라고 한다.

육신묘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순절한 여섯 신하의 묘이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소재.

성삼문! 그는 본시 홍주군 적동리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출생할 때, 공중에서 귀신이 세 번을 소리치면서 순산했느냐고 물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삼문이라고 지었다.

성품이 침착 정중하고 재주가 뛰어나서, 겉으로 보기보다는 그의 사람됨이 훨씬 더 무겁고 튼튼하였다.

세종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는 무려 열세 번이나 그를 요동에 귀양와 있는 황찬이란 중국의 어학자에게 내왕케 하여 음운에 관한 것을 밝혀오라 하였고,

각 도에 흉년이 들면 그를 어사로 명하여 백성들을 구제케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어사가 되어 영남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태백산에 들어가 한 기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기인을 상대로 세상사를 의논해 본즉, 그는 미래사까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 성삼문이 지극히 존경하였다.

그 후 을해년 거사를 앞두고 사람을 보내어 일의 성사 여부를 알아오게 하였던 바, 그 사람이 그 기인의 집에 이르러 보니 그는 간 곳도 없고 벽 위에 글 한 구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천추를 피로 물들여 이름이 만고에 전할 것이니, 내게 물어 무엇하리오.

그리로 갔던 사람이 그 글을 떼어 가지고 왔기에, 삼문은 보고 찬탄하기를,명수가 이미 정해 있도다.” 하고 기꺼이 거사함으로써 사지로 들어갔던 것이다.

성삼문 필체의 일부

성삼문은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삼문 다음에 국문을 받은 사람은 박팽년이었다.

박팽년, 그도 문장과 재덕이 일세에 떨치던 명사로서,

세조가 등극하던 날 비분에 못 이겨서 경회루 연못에 투신 자살하려다 성삼문의 만류로 목숨을 이어 때를 기다리게 되었고, 이어 충청감사, 형조참판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하여 형조참판으로 있다가 이번 일로 국문을 당했다. 그 또한 성삼문과 같이 세조를 나으리라고 부르면서 굴하지 않았다.

네가 나의 녹을 먹었고, 또 나에게 신이라 일컬었으니 너는 나의 신하인데 어찌하여 새로이 배반하려 했느냐?” 세조의 물음에 박팽년은 언성을 높여 대답하였다.

나는 상왕의 신하일 뿐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거늘 어찌 나으리에게 신이라 일컬었으리오!”

이에 세조는 증거를 댈 양으로,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 두루마리를 들이라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 자를 쓸 곳에 모두 ()’ 자가 쓰여 있었다.

원래 장계에는 자를 작게 쓰는 것이므로, 세조는 지나쳐 보았던 것이다. [4]

세조는 그의 명성과 재주를 아끼어,

가만히 사람을 시켜,

네가 마음을 돌리어 나를 따른다면 부귀영화를 길이 누리리라.”

하였으나, 그는 끝내 박차고 악형을 당하다가 형장으로 나갔다. 그때 호송하는 금부도사 하나가 그를 보고,  당신은 참 고집도 세십니다.

잠깐만 그 고집을 거두면, 온 집안이 모두 살게 되고 평생 부귀를 누리실 터인데, 무슨 고집을 그렇게 부리십니까?”그러자 박팽년은 분연히 대답하였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깨끗이 죽는 것이 나으리라.” 또한 기꺼이 형을 받았다.

그의 아우 박대년과 아들 박헌이 모두 연좌되어 죽었으며, 부인도 관비가 되었다가 절사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인 박순의 아내는 태중에 잡히어 투옥되었다가 남아를 분만하였다.

그런데 그 집 여종이 자기 딸과 바꾸어 이름을 박부(朴婦)라 하고 길렀으므로, 박팽년의 혈통이 이어졌다.

성종대에 이르러 이 사실이 드러났는데,사면을 받고 일산이란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그의 손자 박계창 때에야 비로소 참봉벼슬을 했다 하는데, 그가 선생의 기일을 당하여 제사를 지낼 때, 홀연히 신주에 여섯 분이 모여 오므로 그 뒤부터는 육신을 함께 모셔제사지냈다.

그런데 박팽년과 성삼문을 국문한 뒤 잠깐 하옥시키게 하였던 세조는, 끝내 그들을 달래어 보고자 신하를 시켜 태종이 포은 정몽주에게 건넸던 노래를 적어 보이게 하니 박팽년이 먼저 답하였다.

까마귀 눈 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어 성삼문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세조는 이 노래를 듣고 길게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지금은 난신이라도, 후세에는 충신의 이름을 들으리라.”

 

박팽년 유허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유허이다.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2,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

그 다음 하위지는 사람됨이 과묵정대하여, 일찍이 흠 잡을 데가 없고,

그릇된 행실을 발견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문종 때 허다한 인재 중에서 그를 제일로 쳤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그를 예조참판에 임명하매 부득이 일을 보았으나 역시 녹미는 한 톨도 먹지 않고 쌓아두었다고 한다.

그도 단근질을 당하면서 조금도 괴로워하는 빛이 없이 세조를 지켜보며,

나으리는 무슨 의리를 그리 지켰다고 날더러 역적이라 하시오.

역적이면 죽일 뿐이어늘, 이런 악형으로 더 물을 것이 무엇이오.”

하고는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죽었다.

그때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가 열여섯 살이고, 둘째는 열네 살이었다.


 

[5]

금부도사가 나와서 그들을 얽자,두 아들은 그 모친 앞에 꿇어 엎드려,아버지께서 극형을 당하시는데, 어찌 자식이 살기를 바라오리까. 이제 어머님을 영결하는 터이오니, 어머님, 부디 슬픔을 억제하시고 출가치 못한 누이와 함께 관비가 될 것이오나, 부도(婦道)를 지켜 의롭게 살아주시기 바라옵니다.”

하고는 두 번 절한 다음 형리를 따라서 조용히 형틀에 올랐다.

선산 고방산에 선생의 무덤이 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의관총이다.

또 유성원은 강박에 못이겨 세조를 주공에게 비유하는 글을 짓고는 통곡했던 사람이다.

모의가 탄로되어 국문이 시작되던 날 성균관에 있다가 그 소식을 듣고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부인에게 영결을 고한 다음, 사당을 모셔 놓은 방으로 들어갔다.

오래도록 나오지 않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들어가 보니 그는 관복을 입은 채 칼로 배를 갈라 죽어 있었다.

금부에서는 그의 시체를 가져다 형을 집행하였다.

이개는 여말의 이름난 유학자 목은의 증손이다. 세상에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능히 글을 읽을 줄 알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고 하였다.

장성하여 그의 뛰어난 문재를 인정받아 집현전의 학사가 되었다.

그는 몸이 너무 심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그러나 국문을 당할 때 부젓가락으로 몸을 단근질 당하여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용히 말하였다.

나으리! 이게 무슨 형벌이오이까?

어진 사람은 이런 형벌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뒤에 딸이 관비가 되었는데, 이문학관(吏文學官) 임수호(林垂胡)의 부친이 그녀의 자색이 뛰어남을 보고 맞아들여 수호를 낳아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였다.

유응부는 무반의 장수였으므로 기질이 용맹하고, 활과 칼 쓰기에 능숙하였다.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할 때, 너는 벼슬이 이품이거늘 무엇이 부족하여 역적모의를 했느냐?” 하는 세조의 물음에 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질렀다.

내 인군을 위하는 것이 역적이라면 인군을 저버리는 게 충신이란 말인가?

나는 내 인군을 위하여 간신을 없애려다가 간사한 놈의 밀고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빨리 날 죽일 뿐이지 묻긴 무얼 묻는가? ”

세조가 대노하여, 형리로 하여금 칼로 그의 살가죽을 벗기라 하며, 공모자를 물으니 응부는 대답하지 않고 삼문 등을 돌아보며 부르짖었다.

썩은 선비들과는 큰 일을 도모할 게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그때 내가 칼을 시험코자 했더니,

너희들 썩은 유생들이 붙잡고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통분하다.”

그리고는 세조를 향하여,여보 나으리! 물어볼 말이 있거든 저 썩은 유생들에게나 물어보오.” 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조의 노기는 극에 달하여, 형리로 하여금 부쇠로 그의 배와 불두덩을 지지게 하니,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살이 떨어졌다.

그러나 유응부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지지는 쇠가 식으면 다시 불에 달구어 오라고 호통을 치면서 악형을 받다가 마침내 그 자리에 쓰러져 목숨을 거두었다.

그는 지극히 효성스러운 사람이어서, 평소에 그의 모친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드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았고, 거적문을 단 오막살이 속에서 자기는 죽을 먹으면서도 그의 모친 조석상에는 색다른 반찬을 떨구지 않고 차려 놓곤 하였다.

끝내 그의 집안도 모두 연좌되어 죽었다.그날 혹독한 국문이 끝나고 나서,여섯 신하들은 차례로 수레에 실리어 한강가 새남터 형장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육시로 찢기어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다.

때마침 노을이 비낀 형장은 그들의 피로 더욱 붉게 물들었다.

이때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다한 이는, 이들 이외에 김문기 등도 있었다.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죽은 사육신처럼 비록 칼 아래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오직 한 마음, 절개를 지켜 살다가 죽은 사람이 또한 여섯 사람인데,후세에 그들을 사육신에 비기어 생육신이라 하였다.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원호(元昊조려(趙旅) 등을 말한다.

김시습의 별호는 매월당(梅月堂)이라고 한다.그는 난 지 이레 만에 능히 글과 뜻을 알아 세인이 그를 신동이라 하였다.

그가 다섯 살에 임금 세종이 불러보시고, ‘삼각산이란 제목으로 글을 지으라 하였다.

그는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삼각산 높은 봉이 하늘을 뚫었고야,
올라가 북두성을 따 보리라.
뫼뿌리에 일어남이 구름과 안개뿐이랴.
능히 왕도를 만세토록 편안케 하리.

세종이 글을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상으로 비단 오십 필을 하사하시며, 그의 슬기를 시험해보고자, 네 능히 가져갈 수 있겠느냐?”하였다.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비단을 풀어 끝과 끝을 매어서 오십 필을 한 끈에 이어 끌고 나갔다.

세종이 경탄하였음은 물론, 그때부터 그의 명성이 일국을 뒤흔들어, 모두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노새라 하였다. 즉 다섯 살에 그런 재주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가 스물한 살 때, 삼각산 절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단종의 퇴위를 들었는데, 그는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사흘을 통곡하다가 중이 되었다.

그 뒤 사육신이 새남터 형장에서 참혹한 형벌을 받았을 때 아무도 감히 시체를 수습하려는 사람이 없어, 버려져 있던 것을 그가 밤중에 몰래 중들을 데리고 와서 토막토막으로 찢기운 시체들을 주워 모아 강 건너 언덕에 묻어두었다.

의절사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세조 당시 공조판서와 도진무(都鎭撫)에 있으면서 단종복위운동을 벌였던 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가 추가로 꾸며져 사육신 여섯 분이 아닌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금의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는 그렇게 생겨난 것이라 한다.

그는 이내 비분 강개한 세월을 보내다가, 홍산 무량사란 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지 3년 만에 관을 열어 보니 그의 얼굴이 생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문장과 필법으로써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천문, 지리와 의약, 음양술수에 이르기까지 통달치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

남효온은 별호를 추강(秋江)이라 하였다.

그는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기상이 높고 깨끗하였으며 김굉필·정여창·김시습·안응세 등 당대의 쟁쟁한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열여덟 살 때, 현덕왕비를 회복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루어지지 못하매, 그는 개연히 벼슬에의 뜻을 버리고, 산림 속에 묻혀 살다가 평생을 마쳤다.

그는 김종직의 제자였기 때문에 후일 연산군의 무오사화 때, 무덤을 파내어 시체를 찢기우는 형벌을 당하였다.

조려의 별호는 어계(魚溪)이다.

단종이 선위하던 날 명륜당에서 여러 유생들과 울며 작별하고 하향하여 낙동강 기슭에 숨어 살면서 일생을 보냈다.

이맹전의 별호는 경은(耕隱)이며, 그 또한 세상이 그릇되어감을 탄식하며 낙향하였다.

스스로 귀 먹은 체하며, 종신할 때까지 일체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성담수의 별호는 문두(文斗)인데, 그는 교리로 있다가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원호의 별호는 관란(觀瀾)이다.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던 것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단종이 위를 빼앗기자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거적자리 위에서 지냈다. 승하한 뒤에는 영월로 들어가 3년을 시묘하였다.

죽을 때까지 매양 동편을 향하여 앉았다 한다.


'칼멘 글, 시,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기막힌 사실을 아십니까?♣  (0) 2018.12.27
送舊迎新  (0) 2018.12.13
블록체인(Blockchain)   (0) 2018.01.23
♣ 12월의사랑의 아침펀지 ♣  (0) 2017.12.30
♣ 소중한 친구는 ♣  (0) 2017.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