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교양

그때 그 시절

칼멘9988 2011. 12. 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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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 하셨습니까? 
    
    
                                 唯井/朴貞淑    
    늦가을이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여인들은 월동준비
    김장을 하여야 하기에 마음부터 분주하답니다 
    우리는 며칠 전 추위가 온다하여 김장을 했어요.
    농작물 밭에서 김장을 갈아엎어버리는 광경을 보고 
    절대로 배추 사러 가서 비싸다고 하지 않을래요 
    그리고 예전처럼 적게 담으려는 생각도 않고 
    많이 담으려 해요 그리고 아주 맛있게 잘 담아 
    김치 냉장고에 넣고 이웃에게 나눠 먹고 싶어요 
    김장하면 생각나는 그 옛날은 흙을 파고 땅속 깊이 
    김치 항아리를  묻었지요 그 때 그 싱그러운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집집이
    웬 김치를 그리도 많이 했는지, 가지 수 도 많고
    하기야 긴 겨울 부식은 김치밖에 없었으니까요. 
    요즘 김장은 집집마다 그때에 비하면  
    소꼽장난 하는 것 같은 데도 힘이 듦은 
    시대가 많이 변한 탓이라 생각이듭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웃분들이 와서 함께 모여 
    빨갛게 언 손을 호호 불며 서로 품앗으로
    김장하던 지난 날 힘들어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아침 저녁 바람이 매우 차갑습니다. 
    김장철에 옛 생각을 떠올리며... 
    여러분 한 포기씩이라도 더 많이 담으세요 
    김치가 우리 몸에 좋은 것이랍니다 
    기온차가 아주 심합니다.
    감기조심하시고 편안 하십시오!
    
    
    
 

 

 

    그립구나 내고향아 가고파라 나살던곳 누렁이소 워낭소리 정겨웠던 산골마을 가을들판 오곡백과 황금물결 출렁이네 님들이여 보고싶다 어렸을적 소꼽친구 의연하게 살았는가 은빛머리 빛나겠지 소식이나 전해주오 어디에서 무얼하나 식을줄을 모르는가 늙은이의 고향사랑 그림같은 나에고향 멱을감던 맑은강물 누런잔듸 언덕에서 나무썰매 타고놀던 가고파서 오늘밤도 꿈속에서 찿아가네 님이살던 옛집흔적 잡초만이 무성하고 의연하신 엄마얼굴 영정사진 바라보니 소꿉장난 철모르던 어린시절 꾸중하네 식어가는 흐린기억 이내가슴 에이누나 전기줄에 앉자놀던 참새들도 간데없고 하늘저곳 구름마져 고향소식 말이없네 여기저기 낯선얼굴 인심마져 변했구나 주막집엔 노랫가락 장단소리 사라졌고 오며가며 쉬어갈곳 어디가서 찿아볼까
    전원생활 하고싶네 양지바른 고향에서 하늘아래 밭을갈고 달빛아래 씨뿌리고
    여름에는 냇가에서 고기잡아 철엽하여 주렁주렁 달린고추 고추장에 찍어먹고 오고가는 나그네여 내집에서 묵어가소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은  적어도 저런 나뭇단을

서너개는 거뜬히 지는 장사였습니다.

 

마루밑과 처마 밑은 장작을 보관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지요.

 

 

삼림감시원, 즉 똥태가 동네에 나타나면 산에서 가져온

나뭇단은 다 숨겨버리고 처마밑에는 장작만

쌓아두었습니다.

 

 

 

 

잔솔가지 같은 것은 산에서 조달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장작은 시장에서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우리 어린 시절만 해도 다듬이질 하시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고생을 뒤로하고 이제는 다듬이 질을 마치

무슨 음악정도로 느끼는 세월이 되었습니다.

 

 

 

등잔불이 아무리 밝아도 촛불만 못했고 촛불이 아무리 밝아도

30촉짜리 백열등보다 못했겠지요.

그러던 것이 60촉 100촉짜리 백열등을 이어 형광등과

네온사인과 적외선 형광등까지 나왔습니다.

 

 

세상의 변화가 그렇게 빠른데도 아직 우리 가슴속에는

 등잔의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망태기 만큼 용도가 많은 것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속에 토끼풀도 들어갔고 사과나 감자도

들어갔고 벼이삭도 들어갔습니다.

 

 

저렇게 멍석을 보관했다가 잔칫날이나 단오날 혹은

명절이 되면 마당에 펴놓고 신나게 놀았지요.

 

 

 

방안에도 온갖 기구들이 주렁주렁 메달렸습니다.

조리와 가마솥 닦는 솔도 보이고 무명실 트는 활도 보입니다.

 

 

 

 

어머니께서는 부뚜막에 저렇게 음식상을 봐놓으시고

학교 갔다오는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개다리 소반과 상보....정겹지요.

 

 

 

부엌 아궁이 앞에는 언제나 저렇게 땔감이 놓여 있었습니다.

 

 

 

 

시래기와 각종 씨앗들이 처마 밑에서 말라가고 있습니다.

시래기는 겨울철 먹거리로 씨앗들은

이듬해 종자로 쓸 것이겠지요.

 

 

 

우리 집에서 처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저리도 높았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낳으면 이 망속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저 망을 땅에 내리고 바닥에 짚을 뿌려주면

병아리들이 종종거리며 저 속을 뛰어다녔지요.

 

 

 

봉황대 밑 초가집 시절, 어머니는 돼지를 쳐서

살림을 일구기도 하셨습니다.

 

 

 

여치집입니다. 보리짚을 꼬아서 만든 것이지요.

저 속에 여치를 넣고 바닥에 내려놓으면

여치나 곤충들이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원두막은 조무래기들은 물론이요

어른들의 담소 장소로도 제격이겠지요.

 

 

 

 

 

 

아마 저 정도의 우물을 파려면 최소한 저 너비보다

세 배는 더 땅을 파고 내려갔을 것입니다.

우물 파는일이 그렇게 어려운 공사인줄은 파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장군입니다. 물을 담으면 물장군 똥물을 담으면 똥물장군이 되었지요.

 

 

 

 

옴파깨이를 재현해 보았습니다.

오비, 크라운, 환타, 콜라, 진로, 금복주, 이젠백, 칼스버그....

참 종류도 많았습니다.

 

 

 

저 옴파깨이를 멋지게 펴기 위해 철길까지 달려갔던

개구쟁이들이 지금은 최소한 마흔은 넘었을 것입니다.

 

 

한 번더 추억을 곱씹어 볼까요? 구슬입니다.

 

 

 

구슬치기를 다마치기라고 불렀지요.

말속에서 아직 일제 시대의 잔재를 떨쳐버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오색 영롱한 구슬들은 '꼬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맨숭맨숭 단색의 구슬보다 훨씬 귀하게 여겼지요.

 

 

구슬을 찍을 때 프레쉬를 터뜨려 보았습니다.

 

 

 

백열등이나 형광등에 구슬을 비추어 보면 이런 빛깔이 나곤 했었지요.

 


 

 

옛시절이 그리워 질만큼

이젠 우리도 많이 늙었나 봅니다

그제는 엄마가 그리워  고향 굴뚝을 찾아

엄마 품인 듯 어루만지고 돌아 왔습니다.

 

지금의 이렇게 화려한 문명의 시절도

모두 지나고 나면 옛날의 그 시절이 되겠지요

그  땐 지금의 아이들도

그  때의 어릴 적을 그리워하며

고물이 된 스마트 폰을 어루 만지며 눈물 글썽일까요?

 

그렇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만 빼놓고

달이 뜨고 지는 것 만 빼놓고

우리는 이렇게 세월과 함께 모두 늙어가며

옛것이 되어가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