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편1
팔상전(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 태어나는 장면,
3)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 시키는 장면, 7)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기록과 기단석(基壇石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2층 건물의 구조를 위해 안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였다.
2층에 비해 1층이 높은 편이지만 좌우로 7칸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감안하면 아주 적절한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전라남도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170평에 달하는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삼신불 뒤로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불상과 마찬가지로 각각 독립된 후불탱으로서 1925년 보응(普應)·문성(文性) 스님 등이 그렸다.
비로자나후불탱은 세로 616㎝, 가로 348㎝의 커다란 종이에 족자로 이루어졌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크게 자리 잡고 상단에는 문수·보현보살과 성문중(聲重衆),
하단에는 성중과 동자상을 표현하였다.
좌우의 노사나후불탱과 석가여래후불탱은 규모만 조금 작을 뿐 비로자나후불탱과 흡사하다.
대웅전 오른쪽 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고, 왼쪽 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三藏)탱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끝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옛모습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청동미륵대불
절 왼편으로 커다랗게 서 있는 이 미륵불은 여러 번 옷을 갈아입은 전력이 있는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다.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는데,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
운무에 쌓여 있는 청동미륵대불과 팔상전 전경
철당간지주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과 지주가 합쳐진 말이다.
당간은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고도 부른다.
지주는 이 당간을 세울 수 있도록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버팀돌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은 목재로 만들기 때문에 남겨진 예가 거의 없고 지주만 남아 흔히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던 것이다.
1910년 무렵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범종각
범종각은 팔상전의 동쪽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이 네 가지의 법구(法具)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네 가지 법구들은 각각의 용도와 의미를 지닌다.
먼저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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