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국보 역사유적(1) (2) ◈
(1) 북한국보 1호 평양성 (平壤城)
고구려는 427년 보다 조건이 유리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고구려는 지난 시기
수도방위의 교훈과 강력하여진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새 수도용 평양성을 건설하게 되었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 서, 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해자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잡았다.
그 둘레는 약 16km이다.
평양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잇점을 종합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창안해낸 평산성형식의 새로운 수도성이었다
(2) 북한국보 3호 보통문 (普通門)
평양성의 보통문(普通門)은 고구려시대에
처음 세워진 후 조선시대에 와서 고쳐 세워진 성문으로
6세기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그 서문으로 처음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1473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시되었다.
(3) 북한국보 4호 대동문 (大同門)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947년 중건하였다가 1011년 화재로 파괴된 것을
그후 다시 세웠다가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 재건하고 1852년과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완성한 것이다.
(4) 북한국보 18호 칠성문(七星門)
칠성문은 북한지정 국보 제18호로,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 위치한다.
6세기 중엽에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에 처음 세웠다가
1712년 조선시대에 다시 세운 문이다.
이름은 하늘 북쪽에 위치한 북두칠성에서 따 북문이란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 성문의 문루는 정면 3칸 7.38m, 측면 2칸 4.36m의 단층건물이다.
문루에는 사방 돌아가면서 흘림기둥을 세웠는데 정면 가운데는
무지개문길을 피하여 조금 넓게 잡았다
(5) 북한국보 8호 대성산성 (大城山城)
대성산성(大城山城)은 평양 대성산(大城山)에 있는
장수왕때의 고구려의 도읍지이다.
이 산성은 5세기초에 왕궁인 안악궁을 방어하기 위해 대동강북쪽에
쌓은 산성으로 성벽 총길이 9,284m, 면적은 2.723㎢로
고구려의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고구려는 427년(장수왕15년)에 국내성에서 이 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586년(평원왕28년)에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6) 북한국보 10호 대성산성 남문 (大城山城 南門)
평양시 대성산 남부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성문.
문루는 중층건물로 대성산성을 쌓을 때 세운 문이다.
대성산성은 고구려의 중요한 군사시설로 이용되었으며
427년(장수왕 15)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부터는
정치적·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남문의 총높이는 19.5m로, 사격에 이용하는 장벽을 마련하고
거기에 사혈(射穴 : 총구멍)을 만들어놓았다.
(7) 북한국보 18호 을밀대 (乙密臺)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을밀대란 '윗미르터(윗밀이언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여기에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논데서,
또는 '을밀장군(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이
이 곳을 지켜 싸운데서 온 이름이라는 전설도 있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을밀대의 봄맞이)'으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일러왔다
(8) 북한국보 31호 백상루
백상루(百祥樓)는 평안남도안주에 있는고려시대의
건축물로서 관서팔경의 하나다.
(9) 북한국보 23호 평양종(平壤鐘)
대동문 평양종(大同門平壤鐘)은 조선시대에 제작해 대동문
누각에 달아놓았던 종을 말한다.
이 종은 1890년대까지 평양시민들에게 비상경보와 시간을
알려 주었으며 현재의 종은 1726년 다시 만든 것으로
높이 3.1m, 직경 1.6m, 무게 13.5t이다.
(10) 북한국보 36호 동명왕릉 (東明王 陵)
제당(전실 높이 10m,제실높이 13m)
이 능은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5세기에 재축조된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1993년에 대대적으로 개건되었다.
부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동명왕(고주몽, 혹은 추모)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에 능하고 지략이 출중하였는데,
뜻을 같이 했던 오이, 마리, 협부 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동명왕은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고 외적들을 물리치면서
1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하고 있다.
(11)북한국보 179호 고려태조 왕건릉 (王建陵)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역시 주변에 많은 왕릉들이 있다.
34명의 고려 왕 중 16명의 능(陵)이 개성에 있다.
이 중에서 왕건릉(현릉), 공민왕릉, 명릉군, 칠릉군 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나머지 왕릉들은 휴전선 근처 군사지역, 몽고의 침입을 피해 잠시
수도를 옮긴 강화도 등에 분포해 있다.
고려시대 왕릉은 고구려 능묘 전통을 이어받은 발해와 통일신라 능묘의
전통을 이어받아 계승 발전시켜, 조선시대 왕릉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신혜왕후 류씨가 함께 묻혀 있으며,
현재 국보문화유물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12) 북한국보 123호 고려 공민왕릉
고려 31대 공민왕의 현릉과 동쪽에 안장된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을 합쳐 현·정릉이라고 불린다.
(13)북한국보 18호 함흥 본궁 (咸興 本宮)
함흥본궁(咸興本宮)은 조선의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으로 뒤에 왕이 된 방과(정종)와 방원(芳遠: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아들인 태조 방원이 보낸 사신들을 죽이거나
가두곤 했는데 '함흥차사'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국전쟁때 일부 파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보수하여 대부분 복구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정전과 이성계 조상들의 위패를
모셨던 이안전, 누각인 풍패루 등이다.
풍패루
풍패루(豊沛樓)는 주위환경과 잘 조화된 2층 다락집이다.
풍패루 앞에는 넓은 연못이 있고 연못 속에는 작은 섬 하나를
만들어 놓았으며 주위에는 나무를 심어 그늘이 지게 하였다.
풍패루에서는 못 가운데 활짝 핀 연꽃을 보는 광경이 매우 훌륭하고,
잔잔한 연못 속에 풍패루의 2층 다락 그림자가 담긴 풍경이 아름답다.
(14) 북한국보 109호 선화당
함흥 선화당은 1416년의 조선시기 건물로 1764년에 재건한
함경도 관찰사(감사)가 행정사무를 보던
지방관청(감영)의
기본건물이다.
조선정부에서는 지방에 대한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매 도에 관찰사의
행정기관인 감영을 설치하였다.
함흥은 국방상 중요한 고장이었던 까닭에
역대 왕조에서 중요시하였다.
(15) 북한국보 108호 함흥성 구천각 (咸興城九千閣)
구천각(九千閣)은 옛날 함흥읍성의 북장대(북쪽의 군사지휘소)로
고려시대인 1108뎐에 처음 세웠고 조선시대인 1713년에 고쳐 지었다.
함흥성은 고려 때 북관을 개척하고 설치한 9개의 성 중 하나이다.
구천각은 전시에는 전투지휘처로 평시에는
적을 감시하는
망루(초소)로 이용되었다
(16) 북한국보 124호 개성 남대문 (開城 南大門)
1391년에 착공하여 1394년(태조 3년)에 완공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를 했으며, 1900년(광무 4년)에 크게 개수했다.
1950년 한국전쟁때 파괴되어 195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1393년(태조 2년)에 쌓은 석성(石城)의
정남문으로, 남대문이라고도 한다.
(17) 북한국보 159호 개성 산죽교 (開城 善竹橋)
선죽교는 개성시에 있는 돌다리이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갔다가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정몽주의 피얼룩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재북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난간이 없는 다리로 알려졌으나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부가로 설치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고 불리었는데
말 그대로 '착한 땅의 다리'라는 뜻. 후일 정몽주가
이 곳에서 살해당한 후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가지가 솟구쳐
나오게 되었다고 하여 선죽(善竹)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있다는 낭설이 많아 붉은빛을 띄는 돌로
재건해서 현재는 붉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북한 국보 역사유적 (2)
(1) 북한국보 68호 해주 부용당
부용당은 1500년 해주성의 누각으로 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 인조가 태어난 곳으로, 6.25전쟁 때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었으나
2003년에 복원되었다.
‘부용당’은 조선에 하나밖에 없는 수중루정으로.
‘해주팔경’의 하나로 전해져온다
부용당은 못에 박은
33개의 돌기둥 우에 떠 받들려 있다.
(2) 북한국보 118호 경성읍성(鏡城邑城)
(鏡城은 저의 고향입니다)
경성읍성은 1107년에 축조된 토성인데 1434년(세종 16)에 김종서가
절도사로 와서 이 성을 중심으로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였고,
1616년경에(광해군 8) 이미 있었던 성을 확장하여 읍성을 고쳐쌓았는데
유성 혹은 치성이라고도 부르며 성문, 성가퀴, 해자, 못, 우물 등을 갖추었다.
성의 사방에 각각 하나씩의 성문을 냈는데 지금은 남문만 남아 있다
사진을 보면 넓은 평야지대에 경성읍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평지읍성의 전형이 아닌가 생각한다.
경성읍성은 북으로는 청진, 남으로는 길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상 요충지로서 방위상 유리한 자연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벽은 장구 모양으로서, 그 높이는 약10m에 달하고 아랫부분은
한 변이 1.5m 되는 대리석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
성 밖에는 5~6m 깊이의 참호를 파서 성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3) 북한국보 119호 鏡城읍성 南門
경성읍성남문은 조선시대 중반기에 축조된 경성읍성의 남문으로
경성남문 또는 수성문(守城門)이라고도 한다.
성읍성남문은 1756년홍예문으로 개축되었고 1838년에
다시 중수되었으며 그 후 수성문(守城門)의 현판을 달았다
북한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 국보 제119호로 지정해 놓고 있다.
(3) 북한국보 20호 청류정
평양 모란봉 청류벽 위에 있는 현재 청류정 자리는 원래 고구려 시기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將臺, 장수의 지휘소)터였다.
청류정에 올라 앞을 바라보면 청류벽을 감돌아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의
푸른 물이 내려다보이고 강위로는 금릉동굴들과 연결된 다리들이
문수거리로 시원스럽게 뻗어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류정은 다른 누정(樓亭)들과 다른 구조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누정들에 비해 가운데 칸이 매우 넓은 것이다.
청류벽 벼랑에는 천연기념물인 청류벽 회화나무가 자라고있다.
청류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누정이다.
(4) 북한국보 97호 표훈사
신라 문무왕 10년, 서기 670년에 창건된 표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사찰로 역사적인 사료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현재 반야보전등 7개의 건축물이 남아있어 삼국시대
건축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20여채의 건물로 이루어져있었으나 지금은 반야보전, 령산전, 명부전
, 릉파루, 어실각, 산신각, 판도방 등만 남아있다.
반야보전은 잘 다듬은 돌로 쌓은 밑단우에 서있는 넓이가
서로 다른 앞면 3간,옆면 3간의 건물이다.
웅대한 건물규모에 알맞게 장식부재들도 굵직굵직하게 되여있다.
표훈사 보덕암
표훈사 보덕암(表訓寺 普德庵)은 조선왕실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고
귀중한 유물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구려시대에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며, 현재 건물은 167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절벽에 높게 걸린 암자로 그 아래에 구리쇠 기둥 하나를 받쳐 놓았는데
그 길이가 약 7m이고, 절벽의 높이는 20m가 넘는다.
구리기둥 위에는 사가집•배집•합각지붕을 섞어서 지은 3층 암자를 앉혔다
보덕암은 황해도 장수산에 있는 현암(懸菴)과 더불어 절벽에 의지하여 지은
희귀하고도 특이한 다락건물로 구리기둥으로 3층이나 되는 집을
떠받들고 있는 건축기교와 지붕을 만드는 데 전통적 건축양식 등을
보기 좋게 배합한 점이 특징
(5) 북한국보 40호 묘향산 보현사
보현사는 평안북도 묘향산에 위치한 불사이다.
784년에 의상에 의해 세워지고, 고려 때인 1024년에 복원되었다.
원래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팔만대장경은
1984년에 옮기고, 지금은 북한불교의 종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6) 북한국보 144호 보현사 팔각13층탑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앞뜰에 있는 돌탑이다.
돌을 팔각형으로 다듬어 13층으로 쌓은 것으로
고려 시대의 석탑으로는 층수가 가장 높으면서도
형태가 완벽한 탑이라고 한다.
돌의 추녀 끝마다 작은 종이 달려있다..
(7) 북한국보 31호 성불사(成佛寺)
성불사(成佛寺)는 사리원정방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
. 사리원시 북쪽으로 약 8km 떨어진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
898년에 도선이 창건하고 고려말기에 나옹이 중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극락전, 웅진전, 청풍루,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과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중심 건물인 극락전은 한국전쟁때 파괴된 것을 현대에 복구한 것이며,
목조 건물인 웅진전은 고려충숙왕때 세워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 성불사와 고려 시대 양식으로 추정되는 성불사오층석탑은 국보이다
"성불사 깊은 밤 그윽한 풍경소리"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가곡 〈성불사의밤〉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성불사의밤
성불사 깊은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성불사 응진전(成佛寺應眞殿)은 성불사의 대표적 건물이며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하나로 고려시대를 대표한다.
응진전은 극락전과 함께 고려 후기의 건물이고
, 그 밖의 건물들은 조선시대에 세웠다.
(8) 북한국보 119호 온달장군과 평원왕공주의 묘
평양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22㎞ 떨어진 동명왕릉 옆에 있는 진파리 4호분은
북한 학계에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북한에서는 이 무덤이 시조왕인 동명왕릉과 같은 구역 안에 있다는 점과
호화로운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공은 여자, 특히
평원왕의 공주로 추정하여 이 무덤을 평원왕의 공주와 그 남편인
온달장군의합장묘로 추정한다.
(9) 북한국보 145호 사리원 경암루
황해도 사리원시 경암동 경암산 북쪽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1798년(정조 22)에 지은 봉산군의 관아를 사리원으로 옮긴 뒤
1917년 객사(客舍)·아사(衙舍) 등의 건물을 일반인에게 공매하였는데,
지방유지들이 아사 건물의 문루를 사서 경암루를 지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다락건물의 일반형을 보여주는 건물로서 6·25 때 파괴되었으나
1955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0) 북한국보 127호 개성 성균관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그 명칭은 고려 충렬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감(成均監)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가 이어 충선왕 때 성균관(成均館)으로 개명하였다.
공민왕 때는 한 때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일대를 걸쳐
한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11) 북한국보 128호 승양서원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서원으로 정몽주의 옛 집터라 전한다.
1573년(선조 6) 문충당(文忠堂)을 창건하고
정몽주(鄭夢周)·서경덕(徐敬德)의 위패를 모셨다.
1575년에 '숭양'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했다.
1668년(현종 9)에 김상헌(金尙憲)을, 1681년(숙종 7)에 김육(金堉)을,
1784년(정조 8)에 우현보(禹玄寶)를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12) 북한국보 125호 관음사 대웅전
관음사는개성시 산성리 대흥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박연폭포에서 1km쯤 올라가면 있다.
고려 초기(970년)에 처음 세우고 1393년 그 규모를
확장한 뒤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64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관음사에는 대웅전·요사·부속건물과 7층돌탑 등이 있다.
(12) 북한국보 42호 보현사 축성전
상원암의 바로 옆에 1875년에 지은 축성전(祝聖殿)이 있다.
명성황후가 왕세자를 낳은 후 그의 장수를 빌기 위해
금강산과 묘향산 등에 여러 개의 불전을 지었는데 축성전도
그 중 하나로, 공사를 시작한지 10개월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13) 북한국보 13호 법운암
법운암은 평양직할시 만경대구역 용봉리에 위치한 사찰로
원래 평양 모란봉에 있었던 평양 제일 가람 영명사 부속암자다.
한국전쟁 당시 전소된 것을 복원했다.
김구 선생이 만주로 떠나기 전 법운암에 머물며 2년간
삭발염의하고 스님생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대동강변 부벽루에 있던 영명사의 부속암자로,
고구려 때 창건하고 조선시대에 중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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