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상원사
상원사 전경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권속을 거느리고 살고 있다는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별칭인데
그곳에서 자장율사가 유학했고 귀국하여 이 산의 형세를 보고 중국의 오대산과 너무나 흡사하여
이름을 오대산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오대산은 이후 이른바 “문수보살”의 오대신앙 본산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상원사는 주 법당을 “문수전”으로 하여 문수보살을 모셨다.
상원사 전경
문수전의 문수보살(문수동자상)은 세조가 계곡 물에 몸을 씻을 때 등을 밀어주어
등창을 낮게 해준 동자 모습의 문수보살의 현신을 세조가 기억한 대로 조각했다고 하며
이 문수동자상(국보 32호)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국내 유일의 동자상으로서 천진스러움이 잘 나타나 있다.
목조 문수동자좌상(국보32호)
높이 98cm의 이 문수동자상은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1466년(세조12년)에 만들어 모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형상은 “징관대사”의 “화엄경소”에
“문수는 머리에 5불관(五佛冠)을 썼는데 정수리에는 5방으로 상투를 나누었다”고 한 상투 동자형이다.
또한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상원사 영산전
한편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 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좇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 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221호)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에는
“고려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 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있다.
고려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세조가 계곡 맑은 물에 몸을 담갔는데 그 때 옷을 걸어 놓았다는 관대걸이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 에 젖게 하라” 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자객이 있음을 알려 세조의 목숨을 보전케 한 고양이상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
원사 참배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온 뒤로 상원사에서 이십칠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도 정진하였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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