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사찰, 건축물

청량사,축서사,각화사(경북 봉화)

칼멘9988 2013. 9. 17. 10:04

*청량사(경북 봉화)

 

 

 

청량사 전경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청량사는

 

 옛부터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열두 봉우리 중 하나인 연화봉 기슭 한 가운데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청량산은 전남 영암의 월출산, 경북 청송의 주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奇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6)에 의해 중창된 천년 고찰로서

 

 창건당시 승당 등 33개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봉우리마다

 

자리 잡은 암자에서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또한 자연경관이 수려한 청량산에는 한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 (望仙菴)등 대소 27개소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

 

전만이 남아있어 현재 신라시대 대찰의 모습은 없지만 망월암 등 33개 암자

 

가 있었던 유지가 있고 문수보살, 지장보살, 16나한 등이 봉안되어

 

 중생의 근기에 맞는 기도처로서 손색없는 도량의 모습을 띄고 있다.

 

 

 

 

 

청량사 유리보전의 약사여래불(종이를 녹여 만든 지불이다)

 

 

청량사 유리보전 앞의 석탑

 

 

 

 

 

 

 

 


*축서사(경북 봉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에 소재하고 있는 축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 673년(신라 문무왕 13년)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당시 인근 지림사(智林寺, 지금의 수월암)의

 

 주지가 산 쪽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의상에게 알렸고

 

의상이 그곳으로 가보니 비로자나불이 광채를 발하고 있어 그 자리에

 

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867년(경문왕 7)에 부처 사리 10과를 가져와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이후 참선 수행 도량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1705년(조선 숙종 31)에 중건하였는데,

 

당시 법당 등의 전각 6동과 광명루 및 승방 10여 동이 있었고,

 

 암자로 도솔암과 천수암 등이 있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선실·요사가 있으며,

 

유물로 보물 제995호인 봉화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奉化鷲棲寺石佛坐像附光背)가 유명하다.

 

 

높이 108cm의 비로자나불인 이 석불은 창건 당시 의상이 봉안한 것으로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내에 삼층석탑과 석등도 있는데, 각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7호,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 삼층석탑에서 석탑조성명기(石塔造成銘記)가 발견됨에 따라,

 

이 석탑이 867년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단부 하대와 3층 옥신, 상륜 등은 소실되었다.

 

석등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서사 입구 풍경

 

 

축서사 경내 전경과 사리탑

 

 

축서사 석불좌상부광배

 

 

 

 

*각화사(경북 봉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에 소재하고 있는 각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末寺)이다.

 

각화사는 686년(신라 신문왕 6)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나 불에 타버린 것을

 

고려 예종(睿宗) 때 계응(戒應)이 중건하였다.

 

이 각화사는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라 하여

 

물난리와 불난리 및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이런 연유로 1777년(정조 1)에는 이곳에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지어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수장하게 하였으며 수도하는 승려가 800명이 넘어

 

3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1910년 사고와 절이 소실되어 다시 1926년에 달현(達玄)이 이를 중수(重修)하였는데,

 

옛 절터에 남아 있는 3층석탑과 귀부(龜趺)가 전한다.

 

이 모두가 마멸과 파손이 심하여 정확한 고증이 어렵고, 특히 귀부는

 

 비석이 없어져 유래와 시대를 알 수 없다.

 

 

각화사 일주문

 

 

 

각화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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